짙은 남색 양장표지, 음각으로 박힌 금박제목, 책등만 40mm 족히 넘을 논문집 한 권 가해자 탐구, 부록 : 사과문작성가이드
이 극은 <가해자 탐구>라는 제목에 수십여편의 부록과 방대한 주석과 색인이 달린 한편의 논문이다. 동시에 연극보다 오히려 더 연극같은 연극이다.
무대 위 두개의 세계 뒤집혀 빽빽히 빈틈없이 매어달린 의자들, 투영, 또는 이 세계 바로 놓여졌으나 군데군데 이빠진 의자들, 실제, 또는 저 세계 그리고, 무덤 위 무성히 뒤덮은 핑계처럼 의자 위 무심히 놓여진 화분들
무엇이 그림자이고, 무엇이 실제인가. 무엇이 저 세계이고, 무엇이 이 세계인가.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일상인가.
그들이 이 세계라 명명한 곳은 실은 뒤집힌 환영 그들의 몸뚱이가 단단히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보잘것 없는 현실
이 극은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놀랍도록 흡입력 있는 다섯명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도무지 끝이 보이지도 끝이 날 것 같지도 않은 지리한 저술을 시작한다.
불러두기, 대전제, 추전사, 촌평
"이 책은 생성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다 말하거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다 쓰지마. 하지만 다 써야해."
"어떤 고통에 어떻게 이입하느냐 이것이 이 책의 핵심태제이다."
"제가 점해왔던 이 자리를 철회합니다." "이 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몇차의 술자리를 거쳐서야 들렀을까 문단 동인들과 왁자지껄 거나하던 스승의 집, 한나 아렌트 같고, 수전 손택 같던, 스승의 아내가 차려내던 술상에서 그토록 갈구하던 세계, 비루하게나마 자리하고 있다 안도하며 자위하는 이
예술이란 이름으로 주어진 권력과 권위, 당위성에 기댄 폭력과 위선 그 아스라한 신기루, 공고히 쌓아올린 공허한 벽은 이곳과 저곳을 가르며 기웃거리는 자들을 내치고, 무릎꿇고 두팔벌려 숭배하는 이들은 예술의 도구로 대상화하고, 사유화 한다.
부록의 부록도 끝나고, 저자와 발행처와 서지정보, ISBN이 찍힌 바코드까지도 끝나고 책의 마지막 장은 덮였으나 여전히 이 책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이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말한 것처럼, 이 극이 '질문을 던지는 것 이상의 것을 말해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연민과 동정은 '고통받고 있는 그들을 연민함으로써 내 자신이 그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음을 그리하여 내 자신의 무능력과 무고함을 증명하려는 뻔뻔하거나 부적절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 수전손택 <타인의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 기울이고 소리내기를, 비록 답 없는 질문일지라도 멈추지 않기를, 내가 나에게 전하는 말.
2017. 4. 21
가해자 탐구_부록 : 사과문작성가이드 (2017.4.21-4.30 / 남산예술센터)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무대 위 아무렇게나 놓여진 여섯개의 책걸상. 여섯명의 배우. 현재의 교실 그리고, 아이들.
"내 몸이 막 더러운 거에요. 벌레 기어가는 것처럼" "남자를 좋아할 거면, 그건 왜 가지구 태어났냐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인맥도 넓혀야 다시는 이런 일 안당한다" "니가 그런다구 뭐가 바뀔 것 같냐구" "레즈비언이 왜 공부 잘하냐? 왜 공부 열심히 하는데?" "상관없어. 나만 아니면 돼" "가만히 있으라니 가만히 있었죠." "구조된 게 아니라 살아나온거에요." "아직까지는 슬퍼하면 안될 것 같아요. 다 끝날 때까지는" "수련회 안가요? 아, 세월호 씨발" "아직도 우냐?" "어떻게 웃냐?"
배우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아이들의 말. 성소수자에서 세월호까지, 일반(一般)아닌 이반(異般)
레즈비언 색출법 가정통신문, 동성애자 신고 설문지
웃어도 울어도 좋아해도 싫어해서도 안된다. 개인의 자유의지와 생각은 권력과 권위, 종교와 도덕, 사회적 양식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권력, 권위, 폭압, 폭력, 편견, 혐오 앞에 철저하게 짓밟히고 격리, 감시, 검열당한다.
암전. 어느새 깊어진 무대와 끝없이 도열된 책걸상은 그 깊은 폭압의 뿌리를 찾아 현대사 속 역사의 뒤안길, 우리들의 자리를 더듬는다.
박정희 정권, 인혁당, 동백림, 유럽거점간첩단,민청학련,문인간첩, 간첩조작 고문 희생자와 가족들의 목소리로 배우 우범진은 생생하게 증언한다.
대한 뉘우스, 국민체조, 새마을운동...
... 탕!
그리고,
다시 전두환 신군부, 삼청교육대, 깡패척결, 조폭박멸, 팔팔(88)올림픽, 카드섹션, 마스게임, 동원된 학생들, 동원된 웃음 응원과 함성, 대형 태극기는 무대를 덮고 사람들의 자리를 덮어 무덤 위 잡초처럼 시간은 흐른다.
찬송복음 뒤 투영되는 교인들의 기도회, 피켓들. '동성애 퇴치' '성소수자 다수인권박탈' '동성애 박멸 깨끗한 한국'
"나중에, 나중에"
이주민, 무슬림, 지체장애인, 트랜스젠더, 조현병, 성범죄피해자, 성소수자들의 말 그 아래. 태극기 덮인 무대 위로 바닷물이 흐른다. 3년전 4월 그 날처럼.
다시 현재. 교실. 여섯명의 이반 아이들.
"앞으로 누가 날 좋아해줄까?" "그 사람과 잘 살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늙어갈까?" "30대에는 뭘 하고 있을까?"
암전. 박수. 여섯 배우들의 커튼 콜. 다시 암전. 텅빈 무대.
다시 혼자, 나.
남의 잣대 아닌 온전히 나를 꿈꾸는 지금. 여전히 불안하다.
남과 다르지 않아야 했고, 적어도 남만큼은 해야 했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남들하는대로' 살고, '남들처럼만'을 꿈꾸며 열심히 뛰었지만 그 끝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나 지금. 오늘만 산다. 그렇게 매일 하루씩. 쌓아간다.
우린 서로 다르다. 그러기에 같다. 살아가는 모든 '나'에게 응원과 지지의 연대를 보낸다.
이미 알고 있잖아. "국정원의 유우성 간첩조작사건" 누가 나쁜 거 모르나. 다큐멘터리 영화 본다고 뭐 달라져? 그저 빈 주먹 휘두르는 거 밖에 더 있어?
분명 편치 않을 내 마음을 맞닥뜨리는 일. 왜 나는 굳이 일부러 찾아서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내 자신을 스스로 고통스럽게 하는 건가 하고.. 매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늘 그랬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실은 어느 하나도 알고 있지 못한 그저 피상적 관념과 개념화된 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고, 경찰 물대포 살인사건이 그랬고, 또 이 영화 '자백'이 그랬다.
빚진 마음에 무작정 찾아갔던 팽목항 분향소에서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그리고, 시사회장에서
그렇게 마주한 건 어김없이 사람이었다.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누군가의 아들, 딸, 아빠이며, 엄마이고, 이웃이었던 사람들. 고단하고 지친 삶속에 서로에 기대어 소소한 일상에 웃고 다시 또 하루를 견디며 힘내던 사람들. 나와 같은 사람들.
이 영화 역시 그랬다.
그저 소박한 꿈을 안고 이 곳 '자유대한'에 찾아온 사람들 철저하게 기만당하고, 짓밟혀, 청춘과 인생을 무참히 난도질 당해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그 곳에 무표정한 얼굴로
검사라는 이름으로 정보원이란 이름으로 사무원이란 이름으로 직원이란 이름으로
사람의 이름을 내려놓고 그저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
법전을 휘두르고, 증거를 조작하고, 협박하고 겁탈한다.
나는 이 거대하고 숭고한 조직의 일원이니까 이건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을 유지하는 일이니까 이미 결론이 난 일이고, 난 이 일 따라야만 하니까 나는 그저 보고서 몇장 썼을 뿐이고, 나는 그저 증거 몇개 슬쩍 바꿔넣었을 뿐이고, 나는 그저 진실 몇개 뒤로 숨겼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죽였어? 내가 언제 칼로 찔렀어? 그건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
그들 아닌 우린, 나는 정말 그들과 다른 가?
각자의 삶, 일터에서 내 자신의 양심과 사람의 이름을 내려놓고 조직이란 이름과 가면을 쓰고 조직이 내려놓은 결론과 목표를 위해 숨기고, 바꾸고, 꾸미지 않았나?
그렇게 을과 병과 정을 비틀어 짜고, 대리점과 판매점을 기만하고, 고객에게 숨기고, 고용만료 비정규 직원을 내쫓고, 함께 일하던 동료마저 구조조정이란 허울좋은 이름으로 해고당할 때 나는 애써 외면하지 않았나?
그건 회사가 한 거지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나는 그저 기안 올린 것 뿐이라고 나는 그저 도장 몇 개 찍었을 뿐이라고 조직이 시키니까 하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나는 그렇게 그들과 똑같이 항변하고 있지 않은가?
.....
지겹고 역겨운 이 세상에 물려주고 싶지 않은 내가 겪어온 이 현실 속에
또 다시 나는, 우리의 아이들을 구겨넣고 있는 건 아닐까?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미 답을 정해놓은 세상에서
정해놓은 정답만을 강요하는 문제지에 다름은 없고, 오로지 맞고 틀림만 있는 답안지에 아이는 없고 오로지 점수와 등수로만 치환되는 성적표에 시키니까 하는 공부, 정해진 답 맞추기가 전부인 진도에 질문을 잃고, 배움에의 호기심을 잃고 자신의 꿈, 미처 진지하게 고민해보지도 못한 채 기대와 강요에 등떠밀려 입사와 취업으로 바꿔버리고
대한민국의 공중파 방송의 뉴스들은 일제히 '박근혜 대통령의 캐나다방문'을 '실로
감격스런 15년만의 국빈방문이며 100년의 양국 우호관계를 보다 높은 단계로 도약할 중요한 계기(한-캐나다 FTA)'라며
머릿기사로 올려 오랜 시간 다루었다.
심지어 주의깊게 다루어야 할 의제(한-캐나다 FTA)는 간 곳없고, 그저 '서비스산업, 문화산업까지 망라하는 포괄적 파트너십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그의 입만을 따라 적고 있었다.
2005년부터 9년간 아주 오랫동안 심사숙고, 절치부심하며 협상해온 결과물처럼 포장하고 있었지만, 실은 한미FTA 졸속협상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던 2008년 3월 협의가 잠정 중단된 이후 5년 8개월간의 공백기를 거쳐 2013년 11월말 다시 협상이
재게되자 이렇다할 논의도 우리경제에 미칠 영향도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은 채 올해 3월 서둘러 타결을 발표하였다.
우리 정부와 달리, 캐나다 정부는 지난 해 8월 한-캐나다 FTA가 자국 경제에 미칠 영향을 분석해 국민에게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캐나다 FTA로 캐나다의 한국수출은 최대 56%(약 18억 달러) 증가, 캐나다가 한국에서 수입(한국의
캐나다 수출) 하는 것은 최대 19%(10억 달러) 증가하여 캐나다에는 약 8억달러의 무역수지와 11억 달러 수준의 경제적 후생
이익이 생길 것이라 예측하며, 한국 가계 경제의 후생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도 예상했다.
'무역수지적자 8억불, 경제후생 감소' 이게 무슨 협상인가?
게다가 이것은 비단 한국 농축산업의 위기나 자동차산업의 기회로 재단할 문제가 아니다. 한미 FTA를 통해 이미 경험했 듯
'공기업 완전 민영화와 외국인 소유지분 제한 철폐'와 같은 협정 속의 조항을 통해 국가의 기간산업 공공재산을 해외투자처 혹은
해외투자처로 가장하거나 경유한 소수 독점기업에게 팔아넘기는 이른바 '공공재의 사유화'이자 '국부의 유린'이요 '매국'에 다름없지
않은가.
올해 3월 서둘러 한-캐나다 FTA 타결을 발표하던 그 날, 박근혜 대통령은 캐나다 총리와의 회담에서
"한국이 TPP에 참여하게 되면 캐나다 정부에서도 적극 지지해주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던 기사가 떠올라 TPP가 무엇인지 찾았다.
전문가들이 경고하고 있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의 불확실성, 부정적영향, 위험요소는 차치하고서라도 12개 참여국의 협상내용을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춰진 속내가 선명히 보이는 듯 했다.
나라와 국민은 없고, 오직 자신들의 돈과 권력만을 위해 자행되어 온 치욕스러운 일들이 대통령 일신의 감격적인 '이벤트'와 국가적인 '쑈'가 되어 국내의 온 방송 뉴스에 도배되던..
....바로 같은 날,
일본의 후지TV 시사프로그램 '미스터 선데이'에서는 1시간 22분여의 시간동안 '세월호 침몰의 진실'이란 방송을 내보냈다.
"올해 4월 한국에서 일어난 비참한 사고, 승무원과 승객 476명 중 294명이 사망한 대참사였습니다.
여기 배(선실내부가 보이게 제작한 세월호 축소모형)에는 수학여행중이었던 325명의 고교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날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245명이 생명을 잃고, 아직 5명의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이 곳은 단원고의 한 교실입니다. (모든)책상에 꽃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 반의 학생 전부가 생명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이번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고교생 세 명이 미디어를 통해 처음으로 우리 취재에 응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고 후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사고원인의 진상규명조차 되고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학생)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은 뭣 때문에 죽었나요? 사고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지 알려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날 있었던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한국의 정부와 매체가 이대로라면 진상을 규명해주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 2014. 9. 21. 일본 후지TV '미스터 선데이' 내용 중에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같은 재구성 대역 드라마 형식의 이 프로그램은 11개의 선내영상, 사고상황이 담긴 275장의 사진,
관계자 72명, 그리고 생존 학생들의 증언을 통해 제작되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이전까지 공개된 적 없던 실제출항직전사진으로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 참담했다.
그 누구보다 힘들고 평생 짊어져야 할 깊은 상처를 받았을 아이들. 대체 무엇이 아이들 스스로를, 국내매체 아닌 해외매체를 통해서 입 열게 하였는지.. 그 이유가 무언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어제 국정원 댓글 판결을 선고하였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개입'을 한 것은 맞지만 '선거개입'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공직선거에 관한 무죄판결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위법적인 개입행위에 관하여 말로는 엄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동기참작 등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슬쩍 집행유예로
끝내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찾아 출력한 다음
퇴근시간 이후에 사무실에서 정독을 하였다. 판결문은 204쪽에 걸친 장문인데, 주로 개별적인 증거들의 취사선택에 관하여 장황하게
적혀 있고, 행위책임을 강조한다는 원론적인 선언이 군데군데 눈에 띄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선거개입의 목적'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공직선거법위반죄를 무죄로 선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