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푸른 글갈래'에 해당되는 글 87건

  1. 2018.03.13 [독후단상] 로버트 트위거 <작은 몰입> 2018. 더 퀘스트
  2. 2017.12.07 [관극단상] 썬.시연.보엠 - 2017.12.6 (1회), 소극장 창덕궁
  3. 2017.12.01 [관극단상] 뮤지컬, 그대와 영원히 - 2017.11.30 / 한성아트홀
  4. 2017.11.19 [관극기] 파란나라 - 2017.11.4 (3회), 남산예술센터 1
  5. 2017.11.10 [관극기]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 - 2017. 11. 3 (1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6. 2017.10.23 [관극기] Ten Years, Please 십년만 부탁합니다 - 2017. 10. 18 (1회), 남산예술센터
  7. 2017.10.02 [관람기] 연희본색 - 2017.9.30, 남산국악당
  8. 2017.09.27 [관극기] 쟨더트러블 - 2017. 9. 27 (5회), 혜화동1번지 소극장
  9. 2017.09.20 [관극기] 이방인 - 2017. 9. 6 (2회), 산울림소극장
  10. 2017.09.19 [관극기] 여직공 - 2017. 9. 18 (4회), 언더스탠드에비뉴 아트스탠드

[독후단상] 로버트 트위거 <작은 몰입> 2018. 더 퀘스트

소통/책 이야기 2018. 3. 13. 00:09


이 책은 내게 누군가가 되라 강요하지 않는다.
이 책은 내게 무언가를 배우라 강요하지 않는다.
이 책은 내게 성취하고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 책은 내게 끈기를 가지고 1만 시간을 투자하라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은 내게 한 분야에서 모두에게 인정 받는 사람이 되라고 응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뭐 대단하고 거창한 거 말고 그저 소소하고 작은 것이면 된다고.
실험하고 실패하고 그러다 성공하며 느끼는 그 과정의 즐거움을 느끼라고.
내 속에 있는 여러가지 다른 나를 발견하고, 느끼고, 인정하고, 일깨우고, 공존하라고.
서로 다른 나의 시선과 호기심, 모험과 경이가 만들어내는 매일의 즐거움을 결코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2018.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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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단상] 썬.시연.보엠 - 2017.12.6 (1회), 소극장 창덕궁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12. 7. 02:02



다시 길 잃어 그냥 오도카니 섰던 나. 더 없는 치유가 된 공연. 길 없는 길. 길 밖의 길. 순간을 만나고, 즐기고 살아갈 힘을 준 공연. 기쁘고, 즐겁고, 슬프고, 쓰리고, 아프고, 신나고, 먹먹한. 사람, 삶에 대한 이야기. 썬, 시연, 보엠, 세 분. 일상과 기억들, 소중한 꿈과 이야기들 나눠주셔서. 희경쌤, 귀웅쌤 그리고 스태프 분들. 무대 위 공연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보러 갈게요. 늘 응원합니다. 으쌰 2017. 12. 6. 히아누


소극장 창덕궁 앞 풍경 - 2017. 12. 6


<썬. 시연. 보엠>

2017.12.6 - 12.10 / 소극장 창덕궁

제작/공동창작: 쿵짝 프로젝트


연출: 최귀웅

출연: 장선, 구시연, 보엠

영상: 김형규

무대감독: 원선혜

조명: 유보민

학술/행정: 양대은

드라마터그: 임성현

기획/홍보: 나희경 (Play for Life)

그래픽: 황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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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단상] 뮤지컬, 그대와 영원히 - 2017.11.30 / 한성아트홀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12. 1. 14:25




꽤 오랜동안 '무대 위에서 인물 아닌 연기하는 배우가 보여지는 것'과 '참신하지 않은 식상한 이야기와 뻔한 결말, 전형적 제스쳐와 클리셰'에 대해 느끼는 내 스스로의 거부감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러한 공연들이 나와는 다른 지향성을 가진 때문이라 결론 내렸다.


어제 난, 전형적 이야기와 무대 위에 인물 보다 연기하는 다섯명의 배우가 보여지는 한 편의 공연을 봤다. 왜 하는 걸까, 왜 보는 걸까, 무얼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 질문은 더 이상 나의 공명과 공감을 방해하지 않았다. 따듯했고, 슬펐고, 기뻤고, 공감했고, 공명했다. 무대 위에 온전히 순간을 연기하는 아니, 잡히지 않는 순간의 진실을 잡기 위해 매 순간 애쓰고 더듬대며 찾아가는 배우들 위로 내 모습이 겹쳐졌다.


왜 하는 걸까, 왜 보는 걸까, 무얼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할까?

누군가는 살아오고, 누군가는 살아내고, 또 누군가는 살아지고, 누군가는 살아간다.


삶에 이유 있던가. 살아오듯 살아내고 살아지듯 살아갈 뿐.


2017. 12. 1
夢靑閑




뮤지컬<그대와 영원히>

2017.9.5~12.31, 한성아트홀 2관


극작 : 김기석

예술감독 : 김성규

연출 : 김현국


출연 :  김현국(종철), 장예원(혜경), 엄대현(성진 외), 아린(수지), 김대권(진우) *해당회차


기획/제작 : 아뜨스트

프로듀서 : 하종대

음악 : 윤영식, 지은혜, 윤자은

안무 : 강시은

무대 : 장익렬

조명 : 곽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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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기] 파란나라 - 2017.11.4 (3회), 남산예술센터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11. 19. 02:05




어느새 무대 중앙에 걸린 태극기 푸르게 물들자 공연은 끝났다. 따갑던 박수소리도 잦아들 무렵, 가득 채웠던 객석 삼삼오오 일어서던 관객들
사이, 단체 관람이라도 온 것일까 얼핏보기에도 앳되 보이는 나어린 관객들. 함께 온 친구들끼리 주고 받는 말들이 귀에 듣긴다.


"끝에 그게 뭐지?"
"열나 재밌는데.. 어렵다."

..

공연은 벌써 종연 막이 내렸건만, 열대엿새가 지나도록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내 안에서 또렷이 떠오른 심상과 의식만큼,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 저편. 내게 던져진 날카로운 현실문제의 깊은 파고. 들어지는 생각과 감각되는 인식만큼 차마 꺼내어지지 못하는, 답을 찾지 못한 질문에 입은 절로 무겁다.

묻고 싶은 것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쌓여질 수록 내 안에 맺힌 인식과 심상의 실체, 그것을 정의할 적확한 단어와 표현을 찾아 헤매느라 말 한 마디 글 한 줄 외려 내어지질 않는다.

찾으려 다가가려 애쓸 수록 하려던 말은 현실에 단단히 발 딛지 못하고 관념에 붙들려 공허하고 공허하다.

..

꿈과 사랑이 가득한 천사들이 사는 나라
맑은 강물이 흐르는 울타리가 없는 나라

언제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나라
누구나 가보고 싶어 생각만 하는 나라

우리가 한 번 해봐요 온 세상 모두 손 잡고
새파란 마음 한 마음 새파란 나라 지어요

새파란 마음 한마음
온 세상 모두가 손잡아 새파란 나라

..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일까?
모두가 새파란, 모두가 오직 한 마음.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일까?
빨강, 보라, 노랑, 초록, 주황, 감람, 다홍, 분홍, 연두 하나 없이.. 그저 파랗기만 한 나라.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


다수결에 의한 간접정치, 대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전체주의 파쇼로 변질되는가?
일인 독재와 일당에 의한 전체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권리와 목소리는 무시되거나 묵살되어야 하는가?
다수가 지향하는 단일한 이념이란 이유로 구성원 모두에게 강요하거나, 다른 이를 소외하고, 무시할 당연한 준거로 작동되어져도 괜찮은가?

권력(집단)에 의해 땅과 바다, 하늘 위에 선을 긋고 안과 밖을 나누어, 이름과 깃발, 노래와 선언문 따위의 상징을 통해 존재하지 않던 허상을 실재하는 것이라 믿게한다. 또한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여 합의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소수 권력에 의해 제정된 법과 규칙, 규율을 내세워 선 안의 모든 것은 반드시 신고하고, 등록하고, 허가받게 함으로써 전체를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다름아닌 국가 생성과 작동의 원리.

전체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전체는 전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개개의 구성원이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가?

국민이 위임한 주권은 누구에 의해 유용되는가?
전체의 부를 독식한 절대소수 자본권력에 의해 공익과 공리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신자유주의 자본논리를 맹목적으로 좇고 신봉하도록 설계된 사회. 정작 개개인의 생활과, 권리, 복지, 사회적 안전망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파쑈.


..

시민의 힘으로 정권은 교체되었으나, 아직 켜켜이 쌓인 부패와 숨겨진 진상을 밝혀 청산하고 단죄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늘 깨어 스스로에게 전체라는 이름으로 맹종과 맹신, 편협한 우상에 갇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은 아닌지 매 순간 살피고 경계 할 일이다.



2017. 11. 19
夢靑閑



2017. 11. 4. 남산예술센터 - <파란나라>



<파란나라>
극단 신세계 / 2017.11.2-11.12, 남산예술센터

작/연출 : 김수정
출연 : 강지연, 권미나, 권주영, 김두진, 김보영, 김선기, 김정화, 김형준, 문지홍, 박미르, 박세인, 박형범, 양정윤, 이강호, 이은정, 이종민, 이창현, 하재성, 홍승안

드라마터그 : 김연재
무대디자인 : 이상호
조명디자인 : 윤해인
의상디자인 : 김미나
음악감독 : 이율구
음향감독 : 전민배 / 음향조감독 : 이문규
무대제작 : 풀굿
음향오퍼레이터 : 김덕주
조명오퍼레이터 : 김상훈
조명크루 : 김진우, 김태진, 손태규, 오예슬, 이미연, 정태진, 조예지, 최재길
무대감독 : 최민경
무대기기 전환수 : 조철휘
극단기획 : 이찬비
조연출 : 강형준, 민현기, 최민경
영상 : 박영민
사진 : 박일호
인쇄물디자인 : (주)디자인컴퍼니
자문 : 김명화, 이경미
도움 : 이순임, 이주은
협찬 : 율곡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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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기]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 - 2017. 11. 3 (1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11. 10. 01:23




공연을 본 뒤, 프로그램에 실린 작가의 글을 읽어내려가다 작가소개란을 보고 깜짝 놀랐다.

- 김연재: 1995년 서울생,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나는 적어도 올해로 춘추가 예순다섯 즈음 되신 선생님이 한창 글을 쓰던 1980년대 중반 서른즈음에 쓰셨던 작품이리라 생각했었다. (전적으로 나의 편견이었겠지만..)

이 작품의 모티프이자 소재가 되는 사건이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하에 이루어진 '사회명랑화사업'이라 명명하던 '대한청소년개척단 서산자활정착사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로부터 20여년뒤 1980년대 마치 그 사건의 데자뷰인양 재현되었던 전두환 군사정권의 '삼청교육대'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실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더듬어 작가의 나이를 셈하기 전에 이 희곡의 전체적인 전개나 흐름이 최근의 연극씬에서 행해지는 극적 형식이나 실험성은 옅은 반면, 8,90년대 고전적 사실주의 양식과 전형적인 기승전결, 혹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작법을 모범적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올해로 31년이 된 극단 작은신화의 유려하고 노련한 연출주의적 표현양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고백하자면, 이 작품이 지극히 모범적인 작법을 따르고 있기에, 희곡이나 시놉시스를 미리 살펴보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극의 발단부에서 이미 극중에서 벌어질 위기의 사건과 그로인한 인물들의 비극적 파국과 결말, 희망으로 읽혀질 암시로서의 클리셰가 예견되고 읽혀졌다. 한편으론 그러한 이유로 관극내내 그러한 예견이 깨어지기를 고대했기에 아쉬웠고 안타까웠다.

뻔한 이야기 전개와 결말. 극을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분명 재미를 반감시키고, 지루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이 극은 나의 눈과 귀를 잡아 끌었다. 그것은 바로 무대 위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표현주의적이면서도 사실적이고 정성스럽게 지어진 무대세트와 조명, 음향과 효과들이었다.

인물들의 발걸음, 짐을 부리고 내리는 몸짓과 빈 삽질에서 배우들이 수도자가 수행하듯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쌓아 올렸을 그간의 노고와 땀방울들이 고스란히 맺혔다. 오랜 경력과 노련한 배우 분들이기에 유려한 연기술로 장면을 가지고 놀듯 뽐내며 늘어놓을 만도 하련만은, 공연이 진행되는 무대 위에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인물들을 수행하듯 벽돌 한장 한장 쌓아올리는 모습에서 정상을 향해 끝없이 돌을 밀어올리는 코린토스의 왕, 시지프스들을 보았다.

무엇이 연극을 보게 하는가?
무엇이 연극을 만들게 하는가?

답은 어디에도 없으며, 동시에 어디에나 있다. 작가와 연출을 비롯한 스태프 제작진 그리고, 누구보다 배우분들께 진심으로 존경과 찬사, 한없는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2017. 11. 3




아르코에술극장 소극장, 2017. 11. 3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 (2017.11.3 - 11.12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극단 작은신화

작 : 김연재
연출 : 정승헌 / 협력연출 : 반무섭
출연 : 현대철, 임형택, 박지호, 서광일, 이규동, 박상훈, 최순영, 이승헌, 지성훈, 손성현, 김성준, 박소아

무대/의상 : 김혜지
조명 : 노명준
음악 : 김동욱
조연출 : 이홍근
무대감독 : 홍지혁
오퍼레이터 : 양어진, 한주화, 지성근
그래픽 : 다홍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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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기] Ten Years, Please 십년만 부탁합니다 - 2017. 10. 18 (1회), 남산예술센터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10. 23. 11:07




"나를 보러오라고 한거 미안해요."

맨 뒷줄 서너명의 느닷없는 박수. 사람들 따라 치지 않는다. 끝인 줄도 모르게 끝난 공연, 객석 조명 밝아지자 그제야 사람들 손 털듯 박수치며 일어서 나간다. 한 시간 런닝타임은 대여섯 시간 같은 피로감을 남겼다. 공연 전체가 작가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비밀스런 악몽. 꼼짝없이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나. 어느 인터뷰 영상 위탁 보관인의 말 '와, 드디어 해방이다!' 따라하듯 내뱉는다.

"저건 정말 잉여거든. 원래 저는 기능이 없으면 다 버려요." - 위탁보관인 인터뷰 영상 중에서

어쩌면 이 극에서 작가는 존재의미에 대한 담론을 발화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분신이자 자신의 작품, 존재하는 것에 대해 효용과 가치를 따지고 평가하는 타인의 시선 앞에 작가는 '존재하는 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극은 '그저 존재하는 존재'들을 가만 보아넘기지 않는다. 존재하는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방식으로 변형하고, 다른 존재로 조형하며, 심지어 실재하는 무존재, 비어있는 여백, 공간과 순간들까지도 내버려두지 않고 무언가로 끊임없이 채워넣는다.

공처럼 뭉쳐진 소형 작품에서 무대장치급의 대형 작품까지 수십여개의 오브제에 여러대의 프로젝트 매핑, 애니메이션 영상과 비디오 클립, 텍스트와 녹음된 나래이션, 복잡다단한 조명과 효과, 스피커장치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수십여가지 다양한 음향들로도 모자라 일곱명의 검은 퍼포머를 등장시켜 이리저리 오브제를 밀고 끌고 당기고 돌리고 오르고 뛰어 넘는다.

시작부터 끝까지 공연내내 쉴 새없이 나열되고, 진열된 너무나 많은 공감각 정보들은 극을 통해 하려던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들고, 관객에게도 스스로 상상하고, 생각하고, 이입하고, 공명할 순간을 앗아버린 채 혼란과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가둔다. 애써 만들고 덧붙이고 채워넣은 것들은 물론 작가의 작품마저 낭비되고 허비돼 버렸다.

...

왜 극장과 연극이어야 했을까?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없이 그 공간과 시간, 여백 안에 관객들 스스로 보고, 느끼고, 상상하고, 생각케 하며, 때로 함께 공명하고 빛난다.

...

어쩌면 기획자이자 공동연출가 김현진의 말처럼 '70여 분의 시어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70여 분의 화려하고 놀라운 소더비 크리스티 경매 쇼'를 꿈꿨는 지도.
그리하여 수장도 위탁도 어려워 버거워진 작품들이 다른 주인을 만나 컬렉션이 되어 가기를 바랐을지도.

...

왜 만드는가?

왜 남기려 하는가?

...

불쑥 나. 티벳의 승려들이 그리는 색모래 그림 만다라를 떠올린다.

작은 대롱에 넣은 고운 가루 색모래들을 온 신경을 집중해서 미세하게 들숨과 날숨을 조절해 불고 흘려 만들어 내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숨 막히도록 황홀하고 아름답다.

꼬박 짧게는 일주일, 보름에서 길게는 한두달을 매달려 그려내는 형형색색 장엄한 도형과 색모래 만다라. 티베트 불교의 우주와 세계가 오롯이 담겨진 그림.

승려 자신들이 그 긴시간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채 웅크려 한땀 한땀 흘려낸 그림 앞에 물러나 앉아 합장하고 기도한다.

천천히 눈을 뜨고 일어서 금강저 막대기를 들고 그림 앞에 다가간다. 잠시 합장. 만다라가 금강저에 쓸려 흩어진다. 우주와 세계가 사라진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


작가 이주요 자신의 말처럼 '실패나 떨어짐의 결과'가 아니라 'Fall-ING' 떨어지는 그 자체. 순간 순간의 점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듀레이션. 작업을 하고 무언가를 창작해내는 과정과 과정 속에서 그 빛나는 순간과 떨림, 설레임들을 오롯이 즐겨내기를. 그 끝은 어차피 '쿵'일지라도.

그거면 되는 거 아닐까.
어쩌면 산다는 게.


2017. 10. 23.




<Ten Years, Please 십년만 부탁합니다 >
2017.10.18 - 10.22 / 남산예술센터

큐레토리얼 랩 서울

연출, 시나리오, 무대미술 : 이주요
연출, 시나리오, 기획 : 김현진
음향 디자인 : 류한길, 유엔 치와이
안무 디자인 : 이양희
조명 디자인 : 노명준
조연출 : 정지영
조연출, 무대감독 : 이효진
무대미술제작 : 김선민, 이신후
퍼포머 : 은재필, 이이내, 전우진, 정여은, 조백한
공연영상기록 : 이미지
무대상부기기전환수 : 우대진
사진 : 조현우
인쇄물디자인 : 디자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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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기] 연희본색 - 2017.9.30, 남산국악당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10. 2. 03:49


북놀음의 현승훈, 장구놀음의 김소라, 문둥북춤의 허창열, 쇠놀음의 주호영. 네명의 연희자 각자의 개인놀이와 그들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전통연희공연. 단순히 옛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위에 저마다의 맛과 색깔, 이야기를 입혀내어 좋았던 공연. 이 공연의 실질적인 기획연출자이며 <현승훈연희컴퍼니> 대표이자 북놀음 연희자인 현승훈은 자칫 투박하고 단조로울 수도 있는 북장단에 학사위, 외발사위, 엎어배기, 가락배기 다양한 기교와 몸짓, 도살풀이 춤사위를 얹어 담백하면서도 우직한 가락과 호흡을 만들어낸다. 현승훈의 예술적동지, 삶의 동행자이며 여성연희단 <노리꽃>의 대표이자 장구놀음 연희자 김소라는 머리에 고깔을 쓰고 무밭, 배추밭, 유채밭 위를 나는 한 마리 하얀나비처럼 날개짓 팔락이며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 다양한 장단을 조이고 풀어낸다. 관객과 주고 받으며 만들어내는 발랄하고 가벼운 듯 섬세한 호흡은 관객이 절로 흥겨워 들썩이게 만든다. <청배연희단> 대표, 쇠놀음 연희자 주영호가 북, 장구, 징 다른 세명의 연희자와 어울려 만들어내는 정교한 꽹과리 장단, 쇳가락에 일사, 사사, 이슬털이, 면돌림 상모 위에 나풀대는 부포로 표현하는 다양한 춤사위 역시 원숙하고 풍성하다. <천하제일탈공작소> 대표, 허창열의 문둥북춤. 문둥탈을 쓰고 엎어질듯 걷고 쓰러질 듯 서는 춤사위와 닳아 떨어져나갔을 뭉툭한 손마디와 팔로 소고와 소고채를 집어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매일을 반복하며 버티고, 살아내는 우리네 삶,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를 연상케 하며 깊은 울림과 공명을 만들어낸다. 그러기에 그 끝에 울리는 엇장단과 능청능청 몸짓은 슬프도록 황홀하다. 마지막에 네명의 연희자가 함께 어울리며 붙고 떨어지고 맺고 이으며 풀어내는 즉흥연주와 놀음은 재즈의 잼이나 임프로바이제이션과는 다른 상큼하고 새콤하면서도 걸죽하고 진득한 깊이를 펼쳐낸다. 앞으로 함께 또는 각자 저마다 더욱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통해 전통의 바탕 위에 새로운 전통을 세워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

2017. 9. 30




2017. 9. 30. 19:00. 남산국악당 <연희본색>


연희본색 (2017.9.30 / 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극장)
현승훈연희컴퍼니

연희자 : 현승훈, 김소라, 허창열, 주호영
반주 : 김선호, 손정진, 황민왕, 방성혁, 배정찬, 오원석, 김재기, 나현철

무대 : 염준석
조명 : 김려원
음향 : 유대혁
사진 : 송광찬
촬영 : 정해성
영상디자인 : 지경희, 김상준
캘리그라피 : 박정현
기획,홍보 : 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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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기] 쟨더트러블 - 2017. 9. 27 (5회), 혜화동1번지 소극장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9. 27. 13:33

어정쩡한 스탠스 어설픈 계몽극, 그럼에도 불구하고 / ★★★☆☆



바로 코 앞으로 차들이 지나는 앉을 곳조차 없는 건물밖 도로에 흩어져 꼼짝없이 벌 받듯 서서 삼십여분을 기다리다 정시가 몇분 넘어서야 관객들은 열려진 문을 바라보고 눈치를 살피며 주춤 거리다 들어선다.

"남성은 이 쪽, 나머지는 이 쪽"

무대로 들어서는 계단 가운데 한 이가 막고 서서 제지하고 지시하는 이의 손짓에 따라 관객들은 온순한 암수 양이 되어 별다른 저항도 한마디 불평도 없이 좌우로 나뉘어 무대로 들어선다.

'클럽 트러블'. 무대 안쪽 바 테이블 뒤로 세 명의 바텐더. 바 앞으로 늘어선 다리 긴 높은 의자, 무대 바깥쪽 낮고 평평한 단을 비뚤게 쌓아올린 계단 같은 곳에 짙은 '록키호러픽쳐쇼'나 '헤드윅'보다 과하게 짙고 괴이한 화장을 한 배우들이 앉거나 서서 웃고 떠들고 시시덕거리고 장난친다.

어디에도 객석은 없다. 한쪽 구석에 쌓인 등산용 접이식 깔개를 가져다 등받이도 없이 무대 위 비뚤어진 계단 여기저기 내려앉아 비오는 날 고가 밑 비둘기처럼 숨을 고른다.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굽히거나 턱을 괘고, 다리를 펴거나 비틀어 꼬아보지만 러닝타임 한시간 이삼십여 분. 등받이 없는 딱딱한 바닥에 앉아 남은 건 뻐근한 허리와 육체적 피로감.

그리고, 정신적 피로감

....

피로감. 의도치 않은 것에서 불편과 부당함을 느꼈다.

왜 모든 인물들이 튀는 염색 머리에 독하게 화장하고 잘 차려 입은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어야만 하는가?
왜 그들을 마치 동물원 우리안 원숭이처럼 뛰고 기고 어슬렁거리고 기괴하게 웃으며 중얼거리게 했을까?
하고자 하는 얘기를 풀어내는 데 동성애 클럽이나 게이바의 설정이 정말로 꼭 필요한 장치였을까?

소수자를 대상화하고, 과장, 희화하거나 흉내내는 방식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가, 아니 그래도 되는가?

이 극은 관객참여극인가, 아니면 계몽극인가?
그들은 묻는다. 그러나 관객의 말은 단단한 유리벽에 부딪혀 미끄러지는 민들레 포자처럼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이 극을 통해 정말로 관객과 대화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설교하고 계몽하려던 걸까?
상상하고 규정한 우매한 관중들에게 자신들의 관용, 관대함과 성적감수성의 우월함을 설파하려던 걸까?

진짜의 목소리에서 원하는 말만을 가져다 희미한 영상안에 박제화 해놓고 필요한 부분만을 필요한 때에 다시 재생한다. 질문을 뱉은 이들 답하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질문하고 관객에게 답변을 요구하지만, 정작 관객의 목소리와 답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미리 준비해 둔 이야기를 설파할 뿐.

그들은 묻는다. 허나 애초에 내 생각 따윈 필요 없다, 필요한 건 행위에 대한 반응 뿐
스탑 앤 플레이. 세모와 네모를 번갈아 누르는 마이마이 워크맨 카세트플레이어.

가짜들의 잔치처럼 느껴지는 것에서 오는 불편과 부당함

......


적어도 삼십여분전부터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진짜 클럽처럼.

관객 모두에게도 공평한 클럽 의자와 작은 코너 테이블, 자연스레 주문하는 음료와 차, 함께 오거나 만난 이들과 안부를 물으며 공연에 대한 기대와 일상을 얘기하며 웅성거리는 공간. 인물들이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서 슬그머니 젖어들 듯 들어와지면 그렇게 공연이 시작됐더라면 어땠을까?

겉으로는 자뭇 평범해 보이는 우리네 이웃들, 대머리 기혼중년이자 소수적 성정체성, 계약직 회사원이자 소수적 성지향자, 취준생, 배우지망생이자 스트리퍼 성산업 노동자.. 정형화되거나 고정화되지 않은 인물에게서 나와지는 각기 다른 성지향, 정체성, 감수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만나 빚어지는 질문과 소소한 갈등과 깊은 절망과 무기력함 속에 찰나를 스치는 희망. 다시 반복되는 일상. 그것들이 보여졌더라면 어땠을까?

....

꺼내고 싶던 얘기와 마음 감히 헤아려보니 고맙기도 하고, 알 것도 같기에
여전히 시큰대는 허리마냥 아프고, 아쉽고, 안타깝다.


2017. 9. 27
夢靑閑




2017년 9월 26일 오후 7시 35분,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풍경



쟨더트러블 (2017.9.26 - 10.1 / 혜화동1번지 소극장)
극단 창세

공동창작 / 구성, 연출 : 백석현
출연 : 안훈, 하연숙, 김유민, 박성순, 이현경

조연출, 리허설기록 : 최승은
기획 : 김혜진  /  기획보 : 김지은
무대 : 김주영
조명 : 손정은  / 조명오퍼 : 김윤하
음향 : 목소  / 음향오퍼 : 김지숙
움직임지도 : 홍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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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기] 이방인 - 2017. 9. 6 (2회), 산울림소극장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9. 20. 12:40

스무해 변함없는 / ★★☆




"그래, 차라리 제값 다 내고 보길 잘했다. 이제 『산울림』에 빚진 마음 훌훌 털 수 있겠다."

공연이 끝난 극장을 나서, 그어 붙인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뿜으며 흩어지는 연기마냥 중얼댄다.

똑같았다. 20여년 전 내가 그 곳을 나오던 그 때와. 산울림의 연극.

공연내내 그 특유의 연극조 평톤으로 쳐대는 대사들은 오히려 원작 텍스트의 강렬한 이미지와 선명함의 전달을 방해하고, 모호함만 남긴다. 20여년 전이었으면 아름답고, 경이로웠을 장면과 그림들은 더 이상 미장셴이 아닌 고루한 클리셰와 뻔한 제스쳐로만 남는다.평면적이고 전형적인 표현과 동선, 전형적 캐릭터로서만 존재하는 인물의 한계, 세밀한 장면과 에피소드들은 뭉개져 통으로 빚어진 흐름.무대 위 인물은 지워지고, 열연한 배우만 남는다.

리볼버의 약실처럼 회전하는 법정장면은 자뭇 신선하게 보는 이의 눈길을 잡는가 싶었으나, 예의 연극조 평톤대사, 검사와 변호사를 분간할 수 없는 전형적 캐릭터의 표현은 시각적 구성의 신선함을 끝내 덮어버리고 관객의 시선을 떠나보낸다.

아무것도 변하질 않았다. 살아있는 화석. 박제된 연극.

....

왜 우리는 연극을 볼까?

배우가 뱉어내는 대사와 절규, 일그러진 표정과 눈물 무대 위에 사방으로 뿌려지고, 뿜어내던 기운과 에너지 같은 공간에서 직접 느끼고 은혜받고 하사받기 위해서?

푹 삶아지고 쪄졌다가 한꺼풀 벗겨내고 나서는 대중목욕탕의 개운함 그런 것이었는 지도 모른다, 공연을 보고 난 뒤의 개운함.

.....

한때는 나 역시 그러했다. 그 후 겪어냈던 스무해 시간에 나의 취향과 지향은 달라졌다.

그려지지 않은 여백,
뱉어지지 않은 침묵,
하지 않은 연기에

공명하고 공감하고, 가슴 쓸어내리며 먹먹해하다가 소리없이 오열한다.

.....

스무해 전의 연극, 어쩌면 여전히 유효한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돌고 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는 다르다.

.....

홍대 외딴 섬처럼 고집스럽게 지켜오는 산울림의 연극도 그리고, 나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또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존재의 이유가 되어주기를.


2017. 9. 20
夢靑閑



*덧붙임

거들떠 보지도 않을 허섭한 글, 그래도 행여나 누 될까 싶어 눌러두고 담아둔 지 꼭 보름만에 쓰는 관극기. 아이쿠야. 푹 쉰내 곰삭내 천지.



산울림소극장에서 바라본 거리풍경. 2017. 9. 6



<이방인>, 산울림소극장 무대스케치 - 2017. 9. 6


이방인 (2017.9.5 - 10.1 / 산울림 소극장)

원작 : 알베르 까뮈

번역.각색.연출 : 임수현
예술감독 : 임영웅
총괄기획 : 오증자
극장장 : 임수진

출연 : 전박찬, 박상종, 송의열, 박윤석, 김효중, 박하영, 이세준

무대 : 이인애
조명 : 노명준
음악 : 김정용
영상 : 김세훈
분장 : 이윤아
의상자문 : 이신우
영문자막 : 김슬기
기획 : 김보연, 박세희
조연출 : 이세준, 이윤주
무대감독 : 이인애, 김동훈
홍보물디자인, 사진 : 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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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기] 여직공 - 2017. 9. 18 (4회), 언더스탠드에비뉴 아트스탠드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9. 19. 22:46

라디오로는 들을 수 없는 현장의 힘, 4D 입체낭독극, ★★★★★



늦은 9월 월요일 오후, 서울숲 가을 낙조 위로 '언더스탠드에비뉴' 콘테이너 건물들 위를 지나는 전등과 쇼윈도우 불빛 그리고, 한 줄기 바람이 어우러져 느긋하고 평온하다.

입장알림 소리에 들어선 무대. 텅 비었다.

205.7평방미터의 바닥 위에 3층 높이로 올려진 1604.5입방미터의 공간.
그 곳엔 오로지 계단형 가설객석 120석을 꽉 채운 관객 뿐.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다.

빛과 소리. 네개의 노란색 직관등의 조명은 공간의 깊이감마저 허물어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그저 평평한 단면의 화면, 황색이 온통 물들인 공간 위로 눅진하게 쏟아져 나오는 방적기의 소음은 어느새 관객들의 들뜬 잡담마저 짓누르고 심장소리와 공명한다.

"뿌우우우~ 공연, 시~작!"

배우의 일성에 일순 쏟아져 들어오는 네 명의 배우. 무대 위에 실재하는 흑백의 활동사진.
모든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핏기를 앗아간 황색 빛의 마술.
관객은 이미 1930년 일제강점기 우뚝 솟은 굴뚝위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경성 제 4공장 새벽 5시반.

구 소비에트연방의 음악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신데렐라 왈츠(Cinderella Op.87 -19)'가 흘러나오며 무도회장을 향해 구르던 호박마차와 신데렐라, 그 욕망에 투영된 허상과 허무가 복선처럼 드리우고, 네 배우의 발레짓, 샤세 쥬떼 한 발로 서 미끄러지듯 돌고 뛰며 위태롭고 불안정하지만 마치 아무일도 없이 지나는 일상처럼 무심히 흐른다.

"뽑고 돌리고 감고, 접고 펴고 뜨고, 넣고 끓이고 빼고"
일상의 행동은 텍스트의 음절이 되고, 텍스트는 다시 분절된 동작이 되고, 소설 속 모든 텍스트는 배우들이 뱉어낸 음절과 숨소리, 분절된 동작으로 버무러지고 빚어져 무대 위에 세워진다.

타나카의 사무실, 빈 공간이 내는 짧은 반향과 째지는 듯한 울림. 집요한 추궁에 끝내 떠오른 옥순의 기억 한 장면, 한 공간 안에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실재로 불러와 표현해 환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접합하고 그 경계를 허물어 뜨린다.

두 배우는 거리를 두고 객석을 응시하며 반쯤 겹쳐 다리를 벌린채 앞뒤로 섰다.
무대 앞 타나카가 벗어놓은 양말과 두건. 각자의 치마춤을 움켜쥔 손, 다나카의 풀려진 단추 한개, 두건에 가리워진 옥순의 눈.

"넣고 돌리고 빼고, 넣고 돌리고 빼고, 넣고 돌리고 빼고..."

다른 동작은 일절 없이 털끝 하나 닿지 않고도 텍스트, 배우의 분절된 거친 음성, 템포, 숨소리, 공간의 반향만으로 구성된 장면. 관객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상 속에서 더 없이 지독히도 잔혹하고 폭력적인 순간을 마주하고는 뼛속까지 저릿하게 스며드는 냉기에 얼어붙은 듯 숨이 멎었다.

텍스트가 사라진 침묵. 옥순의 몸짓. 새, 방적기, 시지프스, 욕망, 폭력, 강간, 무중력 그리고.. 추락
벗겨진 저마다의 욕망, 그 허상과 허위.

반동이 사라진 공장 아무일 없다는 듯 신데렐라 왈츠위에 미끄러지는 발레처럼 다시 흐르고, 옥순은 두건을 벗어 던지고는 무대를 가로질러 나간다.





이 공연 작품의 원작은 소설 『女職工』은 작가 유진오가 '조선일보'에 1931년 1월 2일부터 21일까지 16회에 걸쳐 게재한 근대 단편소설이다. 양손프로젝트의 <여직공>은 이 작품의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와 텅빈 공간 위에 독자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펼쳐보이고 있다. 헌데, 공연을 보는 내내 지금의 우리들이 떠올랐다. 삼성반도체 반올림이 떠올랐고, 콜트콜텍이 떠올랐고, 쌍용자동차가 떠올랐다. 곳곳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올랐고, 암담하고 불안한 현실 속에서 더듬더듬 앞을 나아가는 무명의 예술가들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다. 이 작품을 썼던 작가 유진오의 오래지 않은 친일변절, 말년의 우익우경 처럼 텁텁하고 씁쓸한 현실이다.


2017. 9. 18
夢靑閑



서울숲 언더스탠드에비뉴 풍경, 2017. 9. 18


여직공 (2017.9.15 - 9.23 / 언더스탠드에비뉴 아트스탠드)
양손프로젝트

소설원작 : 유진오
각색 : 양손프로젝트
연출 : 박지혜
출연 : 김주희, 손상규, 양종욱, 허지원

미술 : 여신동
홍보디자인 : 박승혜
공간후원 : 언더스탠드에비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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