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극기] 가해자 탐구_부록 : 사과문작성가이드 - 2017. 4. 21 (1회), 남산예술센터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4. 25. 18:58




짙은 남색 양장표지, 음각으로 박힌 금박제목, 책등만 40mm 족히 넘을 논문집 한 권
가해자 탐구, 부록 : 사과문작성가이드

이 극은 <가해자 탐구>라는 제목에 수십여편의 부록과 방대한 주석과 색인이 달린 한편의 논문이다.
동시에 연극보다 오히려 더 연극같은 연극이다.

무대 위 두개의 세계
뒤집혀 빽빽히 빈틈없이 매어달린 의자들, 투영, 또는 이 세계
바로 놓여졌으나 군데군데 이빠진 의자들, 실제, 또는 저 세계
그리고, 무덤 위 무성히 뒤덮은 핑계처럼 의자 위 무심히 놓여진 화분들

무엇이 그림자이고, 무엇이 실제인가.
무엇이 저 세계이고, 무엇이 이 세계인가.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일상인가.

그들이 이 세계라 명명한 곳은 실은 뒤집힌 환영
그들의 몸뚱이가 단단히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보잘것 없는 현실

이 극은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놀랍도록 흡입력 있는 다섯명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도무지 끝이 보이지도 끝이 날 것 같지도 않은 지리한 저술을 시작한다.

불러두기, 대전제, 추전사, 촌평

"이 책은 생성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다 말하거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다 쓰지마. 하지만 다 써야해."

"어떤 고통에 어떻게 이입하느냐 이것이 이 책의 핵심태제이다."

"제가 점해왔던 이 자리를 철회합니다."
"이 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몇차의 술자리를 거쳐서야 들렀을까 문단 동인들과 왁자지껄 거나하던 스승의 집,
한나 아렌트 같고, 수전 손택 같던, 스승의 아내가 차려내던 술상에서
그토록 갈구하던 세계, 비루하게나마 자리하고 있다 안도하며 자위하는 이

예술이란 이름으로 주어진 권력과 권위, 당위성에 기댄 폭력과 위선
그 아스라한 신기루, 공고히 쌓아올린 공허한 벽은 이곳과 저곳을 가르며
기웃거리는 자들을 내치고, 무릎꿇고 두팔벌려 숭배하는 이들은 예술의 도구로 대상화하고, 사유화 한다.

부록의 부록도 끝나고, 저자와 발행처와 서지정보, ISBN이 찍힌 바코드까지도 끝나고 책의 마지막 장은 덮였으나
여전히 이 책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이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말한 것처럼, 이 극이 '질문을 던지는 것 이상의 것을 말해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연민과 동정은 '고통받고 있는 그들을 연민함으로써 내 자신이 그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음을 그리하여 내 자신의 무능력과 무고함을 증명하려는 뻔뻔하거나 부적절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 수전손택 <타인의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 기울이고 소리내기를, 비록 답 없는 질문일지라도 멈추지 않기를, 내가 나에게 전하는 말.

2017. 4. 21



가해자 탐구_부록 : 사과문작성가이드 (2017.4.21-4.30 / 남산예술센터)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작/연출 : 구자혜
출연 : 권정훈, 박경구, 이리, 조경란, 최순진

무대미술 : 김은진
조명디자인 : 고혁준
사운드/영상디자인 : 목소
의상디자인 : 김우성
분장디자인 : 장경숙
움직임지자인 : 권령은
조연출 : 김지영
무대감독 : 이효진
사운드/영상오퍼레이터 : 김석기
진행보조 : 김효진
자문 : 송섬별
사진 : 이강물
인쇄물디자인 : 디자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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