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극기] 여직공 - 2017. 9. 18 (4회), 언더스탠드에비뉴 아트스탠드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9. 19. 22:46

라디오로는 들을 수 없는 현장의 힘, 4D 입체낭독극, ★★★★★



늦은 9월 월요일 오후, 서울숲 가을 낙조 위로 '언더스탠드에비뉴' 콘테이너 건물들 위를 지나는 전등과 쇼윈도우 불빛 그리고, 한 줄기 바람이 어우러져 느긋하고 평온하다.

입장알림 소리에 들어선 무대. 텅 비었다.

205.7평방미터의 바닥 위에 3층 높이로 올려진 1604.5입방미터의 공간.
그 곳엔 오로지 계단형 가설객석 120석을 꽉 채운 관객 뿐.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다.

빛과 소리. 네개의 노란색 직관등의 조명은 공간의 깊이감마저 허물어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그저 평평한 단면의 화면, 황색이 온통 물들인 공간 위로 눅진하게 쏟아져 나오는 방적기의 소음은 어느새 관객들의 들뜬 잡담마저 짓누르고 심장소리와 공명한다.

"뿌우우우~ 공연, 시~작!"

배우의 일성에 일순 쏟아져 들어오는 네 명의 배우. 무대 위에 실재하는 흑백의 활동사진.
모든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핏기를 앗아간 황색 빛의 마술.
관객은 이미 1930년 일제강점기 우뚝 솟은 굴뚝위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경성 제 4공장 새벽 5시반.

구 소비에트연방의 음악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신데렐라 왈츠(Cinderella Op.87 -19)'가 흘러나오며 무도회장을 향해 구르던 호박마차와 신데렐라, 그 욕망에 투영된 허상과 허무가 복선처럼 드리우고, 네 배우의 발레짓, 샤세 쥬떼 한 발로 서 미끄러지듯 돌고 뛰며 위태롭고 불안정하지만 마치 아무일도 없이 지나는 일상처럼 무심히 흐른다.

"뽑고 돌리고 감고, 접고 펴고 뜨고, 넣고 끓이고 빼고"
일상의 행동은 텍스트의 음절이 되고, 텍스트는 다시 분절된 동작이 되고, 소설 속 모든 텍스트는 배우들이 뱉어낸 음절과 숨소리, 분절된 동작으로 버무러지고 빚어져 무대 위에 세워진다.

타나카의 사무실, 빈 공간이 내는 짧은 반향과 째지는 듯한 울림. 집요한 추궁에 끝내 떠오른 옥순의 기억 한 장면, 한 공간 안에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실재로 불러와 표현해 환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접합하고 그 경계를 허물어 뜨린다.

두 배우는 거리를 두고 객석을 응시하며 반쯤 겹쳐 다리를 벌린채 앞뒤로 섰다.
무대 앞 타나카가 벗어놓은 양말과 두건. 각자의 치마춤을 움켜쥔 손, 다나카의 풀려진 단추 한개, 두건에 가리워진 옥순의 눈.

"넣고 돌리고 빼고, 넣고 돌리고 빼고, 넣고 돌리고 빼고..."

다른 동작은 일절 없이 털끝 하나 닿지 않고도 텍스트, 배우의 분절된 거친 음성, 템포, 숨소리, 공간의 반향만으로 구성된 장면. 관객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상 속에서 더 없이 지독히도 잔혹하고 폭력적인 순간을 마주하고는 뼛속까지 저릿하게 스며드는 냉기에 얼어붙은 듯 숨이 멎었다.

텍스트가 사라진 침묵. 옥순의 몸짓. 새, 방적기, 시지프스, 욕망, 폭력, 강간, 무중력 그리고.. 추락
벗겨진 저마다의 욕망, 그 허상과 허위.

반동이 사라진 공장 아무일 없다는 듯 신데렐라 왈츠위에 미끄러지는 발레처럼 다시 흐르고, 옥순은 두건을 벗어 던지고는 무대를 가로질러 나간다.





이 공연 작품의 원작은 소설 『女職工』은 작가 유진오가 '조선일보'에 1931년 1월 2일부터 21일까지 16회에 걸쳐 게재한 근대 단편소설이다. 양손프로젝트의 <여직공>은 이 작품의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와 텅빈 공간 위에 독자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펼쳐보이고 있다. 헌데, 공연을 보는 내내 지금의 우리들이 떠올랐다. 삼성반도체 반올림이 떠올랐고, 콜트콜텍이 떠올랐고, 쌍용자동차가 떠올랐다. 곳곳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올랐고, 암담하고 불안한 현실 속에서 더듬더듬 앞을 나아가는 무명의 예술가들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다. 이 작품을 썼던 작가 유진오의 오래지 않은 친일변절, 말년의 우익우경 처럼 텁텁하고 씁쓸한 현실이다.


2017. 9. 18
夢靑閑



서울숲 언더스탠드에비뉴 풍경, 2017. 9. 18


여직공 (2017.9.15 - 9.23 / 언더스탠드에비뉴 아트스탠드)
양손프로젝트

소설원작 : 유진오
각색 : 양손프로젝트
연출 : 박지혜
출연 : 김주희, 손상규, 양종욱, 허지원

미술 : 여신동
홍보디자인 : 박승혜
공간후원 : 언더스탠드에비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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