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극기] 에어콘 없는 방 - 2017. 9. 14 (1회), 남산예술센터

소통/영화,연극,공연 이야기 2017. 9. 18. 15:41

그때의 실험극, 지금의 고풍극 ★★☆☆



가을인가. 금월들어 공연이 많다. 프로젝트그룹에서 산울림, 극사실주의극에서 표현주의극, 장소불특정참여극에서 극장한정극에 이르기까지 롤러코스터 오르내리듯, 열탕과 냉탕에 번갈아 몸 담그듯 다양한 스펙트럼의 공연들을 관극 하노라니 문득 한국 근현대 연극박물관이라도 돌아본 느낌이 든다.


어떤 공연은 막이 내리고도 먹먹한 맘, 손하나 까닥할 힘마저 풀린 채 여운에 젖어 차마 객석을 떠나지 못하는 공연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공연은 용수철이라도 밀어올린 듯 벌떡 일어서 훌훌 털며 객석을 떠나버리게 되는 공연도 있다. 그것은 다를 뿐,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러한 경험을 통해 내가 선호하고, 지향하는 바를 내 자신의 정서적 신체적 반응을 깨닫게 된다. 자아와 타자의 다름을 느끼고, 그로인해 내 자신을 알아간다는 의미에서 분명 의미있는 순간이자 경험이리라 믿는다.

.....

"그래. 맞다. 백수광부였지."

그랬다. 공연을 본 느낌. 전형적 '백수광부'의 연극.

1990년대 후반으로서는 분명 매우 실험적인 '사실주의극'이었을 극연출은 20여년이 훌쩍 지난 2010년대 후반의 시선에선 어느새 옛스러운 '고풍주의극'이 되어 버렸다.

"오백 년 都邑地(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돌아드니,
山川(산천)은 依舊(의구)하되 人傑(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18년 6개월만의 서울, 유신호텔 503호.
'피터 현'은 고국에 돌아온 소회를 길재의 시조를 빌어 읊조린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앙상블, 그들이 빚어내는 유연한 흐름, 고증을 따져 며칠밤을 고민했을 흔적이 역력한 브라운관 수상기며, 금성 선풍기, 무대세트와 대소도구, 장면과 장면이 만들어내는 그림들은 분명 멋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한 장면 신선하게 눈길을 잡아끌지 못한 채 몇번이고 돌려봤을 식상한 클리셰로만 남았다.

아마도 연출의도였을, 종으로 좁게 뻗어 한정시킨 무대 위 무대와 앞 뒤로만 움직이는 동선, 비율이 달라 수직으로 외곡된 흐릿한 실시간 투사영상은 '피터현'이라는 인물이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는 환상의 시간적 장치, 또는 그가 느꼈을 심리적 압박감과 , 답답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 채 오히려 관객에게서 스스로 상상할 기회와 볼 재미를 빼앗고, 전달의 '모호함'과  '불편함'만을 남겼다. 그로인해 딱 한 번 객석 사이로 흩어지며 만들어 낸 극중극 배우들의 군중씬마저도 확 밀려드는 무대의 확장으로 체감되지 못하고, 영화나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여러번 봤을 법한 상투적인 표현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왜 '피터 현'이어야 했을까?
왜 42년전 이야기여야 했을까?
왜 2017년 9월에 1975년 8월의 이야기를 가져왔을까?
유신호텔 503호를 통해 지금의 우리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던지려 했을까?

아쉽게도 공연은 관객 스스로가 그때와 현재가 공존하는 무대가 만들어 낸 현재와 다르지 않은 그때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상황, 현실, 문제, 개인과 사회의 이야기를 공감하게 하는 방식으로서 작동하지 못하고, 시대의 담론을 담아내거나 공유하고 발화하는 데 실패한 채, 자기표현주의적 서사에 그친다.

....


"청춘을 다 보내고 늙고 비루한 말이 되어 돌아왔네"

우리 세대를 누리고, 풍미했던 한 시절의  연극. 그 뒤안길을 보는듯 안타깝고, 애틋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리깊은 나무처럼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너른 그늘과 기댈 곳이 되어주기를. 가지 끝마다 새순 돋고, 꽃 피워, 새로운 열매 맺어주기를 바라며 열연해 준 배우, 스탭 분과 들께 진심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2017. 9. 18





남산예술센터. 2017. 9. 14. <에어콘 없는 방>


에어콘 없는 방 (2017.9.14 - 10.1 / 남산예술센터)
극단 백수광부

작 : 고영범
연출 : 이성열
출연 : 한명구, 홍원기, 민병욱, 김동완, 최원정, 김경희, 주예선, 심재완, 윤상원, 전주영, 이영재, 신주호, 박정현, 유승민

드라마터그 : 조만수
무대 : 박상봉
조명 : 김성구
음악 : 김동욱
의상 : 이수원  /  의상팀원 : 박인선, 신나라, 최은영
분장 : 이동민  /  분장팀원 : 이수연, 안소연
영상 : 윤형철
모션그래픽 : 김희정
인형제작 : 문창혁
무대감독 : 김은선  /  무대조감독 : 안수민, 노희국
조연출 : 김세홍
기획 : 코르코디움
사진 : 윤현태
인쇄물디자인 : (주)디자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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